일본의 연말 풍경은 여느 나라가 그렇듯이 학교는 방학을 맞이하고, 회사는 정산을 하며, 개인들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바쁘다. 캐롤송과 크리스마스 테마 음악은 11월 초부터 거리마다 울려퍼지고, 12월 중순쯤 되면 올해의 마지막을 누구와 보내게 될 것인지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일본의 회사들은 12월 마지막 주부터 1월 첫째 주까지는 반드시 연말연시 휴가를 갖기 때문에, 은행과 각종 업무들은 그전에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나는 가장 바쁘다는 12월 셋째주 20일에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첫 입주에 성공하고, 2017년의 마지막을 홀로, 타국에서 보냈다. 그것은 조금 외로웠으나 특별한 기억이었다.
마무리를 한다는 것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도입부에 ‘에스트라공’은 그의 파트너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you always wait till the last moment.)” 그러나 이야기는 끝을 맺지 않고,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베케트가 보여주는 역설이다. 인간은 흔한 종말이나 죽음을 설파하면서 동시에 미지의 연속성을 다룬다.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든,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이든 자유의 이름 아래 허락되지만, 막상 그것이 닥쳤을 때 ‘인지’할 수 있으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의심하는 동시에 쉽게 믿는다. 연말이 되면, 지난 날들이 아쉬운 동시에 빨리 내년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되풀이 하기도 한다. 설사 상황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른 때보다 좀더 희망차게 보일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계절을 유예받은 것이다. “내년에는 잘 될거야”, “더 건강하고 행복할거야”, 미래를 품은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괜시리 뺨이 붉어진다. 연말의 차가운 공기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덕담이나 밝은 소식에 덮어지기도 한다.
12월 31일
섣달그믐인 12월 31일은 大晦日(오오미소카)라고 부르며, 대개 대청소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이때 현관 문앞에 장수를 기원하는 대나무로 장식한 門松(카도마츠)와 액운을 막아주는 새끼줄 しめ飾り(시메카자리)를 세운다. 저녁에는 NHK에서 방송하는 우리나라 가요대전 식의 프로그램인 紅白歌合戦(홍백가합전)을 보며 年越しそば(토시코시 소바)나 우동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일본은 새해 1월 1일을 お正月(오쇼가츠)라 부른다. 한국에서의 설 개념인데, 음력 설이 없으므로 1월 1일이 새해 최대 명절이며,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가족들이 있는 본가로 귀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침이 되면, 집집마다 연하장이 도착하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그래서 연말 우체국은 연하장을 전송하려는 고객으로 붐빈다) 우리나라의 떡국과 비슷한 お雑煮(오조니)와 お節料理(오세치료리)를 먹는다. 그후엔 한해의 소원을 비는 初詣(하츠모우데)를 하기 위해 신사에 간다.

끝과 시작
어느새 돌아보면, 마지막이 멀지 않은 순간이 있다. 전세계를 덮친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경제와 생활이 마비되고, 몸와 마음이 묶여 어딜 가나 편치 않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누구도 무엇 하나 약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지쳐만 간다. ‘Nothing can be done’과 같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상황처럼, 우리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199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짧은 문장을 남겨본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중략)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