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최대 번화가이자 관광지구인 긴자(銀座)의 고층빌딩숲 사이로 보랏빛과 황금 휘장을 휘날리는 전통 기와지붕 건축물을 엿볼 수 있는데, 이곳이 일본의 전통예능인 가부키(歌舞伎) 전용 극장인 가부키좌(歌舞伎座)이다.
일본 전통 예능의 살아있는 역사

대학원 수업에서 ‘일본연극사’를 지도하시는 오리타 코우지 교수님의 초청으로, 도쿄 긴자에 위치한 가부키좌 무대 리허설을 관람객 신분으로 참여했다. 가부키좌는 일본 연극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전통 예능 가운데 하나인 가부키를 수백 년 동안 한 자리에서 명맥을 이어온 역사적 장소이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역사적 스타들이 이 무대를 거쳐갔으며 현재까지도 가부키 배우들의 명성과 자부심은 어떤 역자(役者; 무대배우를 칭하는 말)보다 드높다고 말할 수 있다.(오리타 교수는 그러한 가부키 업계에서 지난 수십 년을 거쳐오면서 전통예능을 연구하는 학자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연구자이다. 그 증거로 80년도에 제작된 가부키좌 실황기록과 백스테이지, 리허설 풍경에서 오리타 교수님의 앳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가부키좌의 역사를 돌아볼 때, 교수님은 단 하루라도 치열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다.)가부키좌는 긴자 특유의 명품숍과 높은 빌딩숲으로 즐비한 화려한 도심 거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다.
현재 가부키좌의 모습은 가장 현대에 들어서 재정비된 4층짜리 건축물로서, 크게 3세대에 걸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고, 내부에는 무대와 상점, 기념품 가게, 외국인 또는 관광객을 위한 가부키 체험관 등이 있다. 참고로, 전통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 가부키좌 바로 뒤에 우뚝 서있는 고층건물은 가부키 사업을 관리, 담당하고 있는 주식회사 쇼치쿠(松竹)의 빌딩이다.

내가 방문할 당시에는 무대 리허설이 한창으로, 스태프와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을 금하고 있었으나 공연이 있는 날에는 외부에 있는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하여 입장할 수 있다.허가된 관람 시간은 약 한 시간 반 가량으로, 2층 맨 뒷줄 좌석에서 죽은 듯이 무대를 지켜봤다. 가부키를 포함한 일본 전통예능의 출연자, 관계자들의 까다롭기로 소문난 성격은 업계에서 익히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곧 전통을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그들만의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명망 높은 가부키 가문의 배우인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蔵)는 그 핏줄 뿐만 아니라 수려한 외모와 재능, 매력으로 어릴 때부터 촉망받는 인재였으며, 그가 본격적으로 선대의 이름을 물려받으면서부터 (가부키 업계에서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데서부터 진짜 배우로서의 활동이 시작한다고 본다) 그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한편으로, 패기가 왕성한 시절에 주먹다짐을 하거나 다양한 연애를 즐기면서 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전도유망한 아나운서 코바야시 마오(小林麻央)와 결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비조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다. 이후 자녀 둘과 유튜브를 개설하여 시청자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 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으나, 업계 측에서는 위신과 체면을 내세워 반대하고 있는 입장을 은근히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가부키 배우들의 가십과 뉴스가 일본 연예속보로 등장하는 일이 적지 않으며, 가부키 업계는 일본 방송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가부키는 쉽게 말해 (본격적으로는) 에도 시대부터 시작된 전통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한 명의 가부키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연기를 하는 것처럼, 그들의 모든 사생활은 대중들에게 노출되며 이를 통해 다시 인기를 반복한다.
현존하는 가부키 전래 대본은 그 가짓수가 200여편에 채 달하지 않는다. 대부분 비슷한 내러티브, 영웅과 미녀 캐릭터, 권선징악 메세지가 복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부키 극장을 찾는 이유는, ‘배우’를 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 1)가부키 무대가 아닌 ‘이치카와 단쥬로’(이치카와 가문의 배우의 이름)를 보러 가는 것과 2)’이치카와 단쥬로’가 아닌 ‘이치카와 단쥬로’를 보러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1)의 경우는 ‘이치카와 에비조’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와 움직임을 보러가는 것이고, 2)의 경우는 현재 눈앞에 있는 ‘이치카와 에비조’가 아닌 그의 선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현현을 보러가는 것이다.
즉, 가부키 가문에서 태어난 배우들은 전통 그대로 내려오는 표정, 손짓, 발짓, 목소리톤, 연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하며 복습을 거듭한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는 따라하는 것이면서 할아버지는 흉내내는 것이자 다시 아버지는 배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배우도 ‘똑같은’ 배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연습실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거울처럼 흉내내면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을 뛰어넘어선 안된다. 그것이 가부키의 규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키 관객들이 ‘이치카와 에비조’를 보며 그의 아버지 ‘이치카와 단쥬로’를 추억하면서 어느 때에선가 ‘이치카와 단쥬로’로 존재했을 에도 시대의 명배우의 모습까지 마음 속에 그려내는 것이다. (만일 플라톤이 가부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내가 참석한 리허설에서 이치카와 에비조는 정중하고 침착하게 무대연습에 임했으며, 필요한 부분을 빠짐없이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로지 무한한 복습과 재확인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일본 전통예능의 이면과 그속에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진귀한 기회였다.
가부키좌 공식 홈페이지 : https://www.kabuki-za.co.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