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소장될 수 있는가? 영상/사진 매체와 연극을 구분짓는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하나는 ‘현장성’이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 카메라와 각종 장비를 동원해도, ‘지금 이 순간’의 강렬함은 결코 렌즈 속에 담길 수 없다. 그러한 찰나는 기록될 수 없으나 순간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서 무대와 배우와 관객이 만나는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연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순간-예술로서의 연극은 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 있다. 영화, 드라마, 라디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곳곳이 도큐먼트화/영상화 되어간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연극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영상/기록화된 연극은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
츠보우치 쇼요와 와세다

일본의 명문대학 와세다 대학교(早稲田大学)의 교내 건물 중 하나인 츠보우치 박사 기념 박물관(坪内博士記念博物館)은 일본 최초의 연극박물관(演劇博物館, 엔박 이라 불림)이라 말할 수 있다. 와세다 대학은 일본 3대 명문대학인 동경대(東京大学), 게이오 대학(慶應大学)와 더불어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 분야별 유수 학자,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 등을 배출해낸 전통있는 사립대학이다.
연극박물관은 영문학자 츠보우치 쇼요(坪内逍遥)가 약 20년 간에 걸쳐 집필한 전40권의 번역사업인 《셰익스피어 전집》의 완성을 기념하여 1928년 10월에 캠퍼스 내에 설립되었다. 츠보우치 쇼요는 그의 작품과 교육활동, 특히 일본인 최초로 셰익스피어를 번역하여 소개했다는 점에서 일본 근대문학에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인물 중 한사람이다.
현재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 교수이자 베케트 연구자인 오카무로 미나코(岡室美奈子) 교수가 제8대관장로 재임하고 있으며, 상설전시와 특별전시, 체험견학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랑하며 꾸준히 고전부터 시작하여 근현대 일본 연극 작품들을 아카이브화 시키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운영하지만, 현재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전시해설과 체험견학이 중지된 상태이다.
연극의 아카이브화의 가능성

티켓 없이 입장이 가능한 이 박물관은, 100년 전 그대로의 근대 건축 스타일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낯선 시대에 방문한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1층은 근대 영화배우 쿄우 마치코를 기념하는 특별전시실로 일본의 영화와 텔레비전 방송을 관람할 수 있으며, 2층에는 츠보우치 쇼요 기념실로 당시 셰익스피어 번역에 사용된 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세계 연극(유럽/아프리카) 등으로 전시실이 나뉘어 일본 연극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내가 방문한 시점에 기획전으로 ‘가부키의 역사’에 대한 전시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연극박물관에서는 평소에도 전통예능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한, 츠보우치 쇼요의 뜻을 이어받아 매월 간격으로 전문가에 의한 셰익스피어연극강좌를 개최하는 등의 이벤트를 주도하고 있다.
연극박물관의 매력적인 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층에는 메이지 시대 이후의 근현대 연극 상연 자료 등 일본 연극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출판서적, 잡지, 대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장르는 노, 가부키, 분라쿠 등의 전통예능부터 신파극, 신극, 근대극, 방송 및 라디오 시나리오까지 다양하다. 열람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가능하며, 반드시 신분증을 확인하고 접수한 뒤에야만 입장이 가능한데, 열람이 끝나면 돌려받을 수 있다.
연극을 기록하는 것의 의의

우리나라의 경우,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이 한국 최초의 공연예술 전물박물관으로 설립한 이래부터 현재까지의 자료들을 보존하고 있으며, 연계체험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박물관이 의의란 본래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는 사례연구와 ‘지금’과의 소통을 통해 그것을 미래로까지 나아가게하는 힘을 갖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공연의 유통과 다양화가 촉구되면서, 기록물에 그치지 않는 연극에 대한 아카이빙의 논의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과 콘텐츠 등의 문제로 공연영상화는 민간이나 개인 아티스트에게 있어 아직은 먼 과제로 남아있다. 나 역시 개인 도큐먼트를 위한 영상물이 아닌 ‘영상용 연극’을 위한 작품 제작에는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빈 객석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금’과 만나야 할까.
와세다대학연극박물관 홈페이지(https://www.waseda.jp/enpaku/)